해남 달마산 땅끝마을 보길도
산이름 : 달마산 ( 498m )
산위치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산행일자 : 2009년 10 ~ 12일
1박 2일 테마산행
교통편 : 42인승 버스대절
이번 테마산행은 1박 2일 일정으로 달마산, 미황사, 땅끝마을, 보길도를 차례로 답사하는 코스로 진행하였다.
제 1일 째
달마산을 오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달마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서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인 석가의 부탁으로 동쪽인 중국으로 갔는데 그 당시 양나라 무제는 달마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절도 많이 짓고 승려도 많이 배출했으니 불사에 공적을 세운 것이 아닙니까하고 물으니 달마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궁전을 물러났다.
달마는 아직은 중국에 불법을 펼 때가 아니구나 하면서 소림사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수도를 한다.
해남 달마산 암릉
달마는 9년의 면벽수도를 마친 후 그를 찾아 온 혜가에게 선법을 가르쳐 주고 돌연히 행적을 감추었다. 그 당시의 중국인들은 달마가 해동 (해동은 우리나라를 뜻함) 으로 건너가 안주한 곳이 해남 달마산으로 믿고 많은 제자들이 해남 달마산으로 찾아왔다.
불교계파 중 선종의 시조를 달마대사라 하는데 우리나라는 신라 때 법랑에 의해 도입 되었으며 고려 때는 선종이 침체되었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대사가 순천 조계산에 수선사를 지어 선종 내에 조계종파가 생겼는데 현재는 조계종파에 흡수 되었다, 수선사는 송광사의 옛 이름이다.
미황사의 전설
통일 신라 경덕왕 때의 일이다.
해남 땅끝 마을 앞 해안에 이상한 석선(石船)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여긴 해남 주민들이 석선으로 다가가면 그 석선은 멀리가고 주민들이 다시 돌아오면 석선은 해안 가까이로 다가오곤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의조화상이 목욕재개하고 해변에 가니 석선이 해안에 닿았다.
그 배에는 화엄경, 경전, 탱화 등 많은 불교 문화재가 실려 있었다. 석선에서 어느 노승이 나타나 의조화상에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 사람인데 불상을 모시러 금강산에 갔는데 너무 사찰이 많아 모실 곳이 없어 돌아가던 길에 달마산이 금강산과 닮아 이곳에 불상을 모시려 왔다 하였다. 우전국이라 함은 중국 서부의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중국의 자치 국가이다.
석선의 노승이 의조화상에게 말하기를 내일 아침 황소에 경전과 불상을 모시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은 곳에 불상을 모셔주시오 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의조화상은 우전국의 노승이 말한대로 황소 달구지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황소가 첫 번째 앉은 곳에 통교사를 짖고 두 번째 누워 일나나지 않는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황소 울음소리가 아름답다하여 아름다울 미, 소가 누렇다하여 누루 황자를 써서 절 이름을 미황사로 이를 지은 것이다.
땅끝마을로 오다
우리나라 국토는 남과 북의 양끝이 있다. 북의 끝은 역사의 변천에 따라 고구려 때는 만주가 끝이고 고려 때는 평양, 조선 때는 백두산이지만 지금은 휴전선이 북쪽의 끝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남쪽 땅 끝을 지켜주는 곳이 이곳 해남 갈두리인 땅끝 마을이다. 이번 1박 2일 테마산행에서는 이 곳 땅끝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제 2일 째
보길도에 오다
세연이란 깨끗한 자연을 의미한다.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인공호수를 만들어 가운데 정자를 짓고 주로 연회와 향연을 많이 하였던 곳으로 알려진다.
고산 윤선도는 해남 윤씨이며 윤선도의 고택은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다.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서인 총수인 송시열과는 정적관계이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고 왕자는 강화도로 피난을 갔지만 윤선도는 수행을 하지 않고 고향에 있었다. 만약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면 삼전도 굴욕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51세의 윤선도는 강화도의 왕자를 구하려 집안에서 부리던 100명의 머슴을 데리고 영광에서 배를 타고 구하러 갔으나 이미 왕자는 청에 붙잡혀 갔다.
이후 윤선도는 제주도에서 은거할 생각으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보길도에 들어와 잠시 정박하고 있던 중 보길도의 경관이 너무 좋아 눌러 앉게 되었다.
그 후 남한산성에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하여 영덕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다시 보길도에 들어와 임금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보길도에서 죽을 때 까지 살았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며 윤선도와 다른 길을 간다. 숙종 때 서인이자 노론의 수장 송시열은 왕세자 책봉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귀향을 가다가 보길도 근방에서 풍랑을 만나 윤선도의 섬, 보길도에서 잠시 머물다가 자신의 심정을 바위에 글을 썼는데 바위에 썼다하여 암각시문이라 부른다.
“ 팔십 3세 늙은 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고 있다.
한 마디 말이 어찌 그리 큰 죄가 된다고
세 번이나 쫒겨나니 내 신세 참 궁하구나
북녘에 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쪽 바다로 가는데
의지 할 것은 바람 뿐,
초구에는 옛 은혜 서려 있어
감격하여 외로히 눈물 흘린다.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국문을 받으로 한양으로 오다가 정읍에서 85세에 사사 된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이 많다
윤선도와 송시열
윤선도가 송시열보다 20년 연상이지만 남인과 서인을 대표하는 정적관계의 인물들이다.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죽은 후 15년 후 송시열이 제주도 유배 길에 아이러니하게도 윤선도의 섬 보길도에 들려 돌에 시 한 수 새긴 것이 암각시문이다.
1박 2일 테마산행의 마지막 날.
보길도를 떠나려는 노화도 선착장에서 대기하던 중 예기치 않는 교통사고로 필자는 한 달동안 순천향병원에 입원을 하게되어 동료들에게 많은 걱정을 안겨주었다.
KY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