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산하

조령산에 흐르는 설화

케이와이지 2019. 6. 25. 16:52

산이름 : 조령산 (1,026m )

산위치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산행일정 : 미상

교통편 :  42인승 버스대절

     

조령산 정상

                                                                      

령산은 문경새재의 박달나무의 대명사로 불린다. 박달나무로 만든 홍두깨는 방망이가 아니고 방망이의 재료가 박달나무일 뿐이다. 홍두깨는 직경 (7-10cm) 길이(70-90cm) 둥근 원형으로 가운데가 약간 볼록한게 특징이며 옛날 가정에는 다듬이는 많지만 홍두깨는 귀한 것이라 부잣집에서만 볼 수 있는데 보통 다듬이질 한다와 홍두깨 올린다라고  표현한다.

 

다듬이는 일반 요, 베게, 호청등을 다듬지만 홍두깨는 고급 옷가지를 다듬는다. 홍두깨에 올린 옷을 입고 걸으면 비단소리가 난다. 귀한 옷에는 풀을 할 때 잣을 섞어서 했는데 잣풀을 먹이고 홍두깨에 올린 옷을 입고 걸으면 잣 향기와 비단소리가 나서 그 당시 최고의 호사였다 한다.

 

* 아닌 밤중에 홍두깨의 해학 * 

아닌 밤중에 홍두깨는 느닷없는 일을 당했을 때 쓰는 말이며  조선시대의 남자들은 아내가 죽으면 개가하고 첩질도 하였는데 여자들은 남편을  잃은 뒤에도 개가하는 것이 금지 되었을 정도로 남존여비의 유교사상 이었다.

 

 1894년 갑오경장 이 후부터는 여자들의 개가가 허용되었고 따라서 남편을 잃은 여자들은 더러 밤중에 누가 몰래 업어가길 바라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인습에서 나온 것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나왔는데 여기서 아닌 밤중이란 말은  밤인 아닌 대낮을 의미하고 홍두깨는 남성의 성기를 빗대는 말이다. 한 밤도 아닌 대낮에 남자에게 일을 당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멀리 주흘산이 보인다

                     

영남대로를 사이에 두고 조령산과 주흘산이 마주보고 있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1392년부터 1910년 까지 존재하였으며 한성에서 부산 동래까지 잇는 간선도로이다. 이화령이 뚫리기 전에는 영남사람들의 서울길이다.

 

영남대로에는 세 개의 관문이 있으며 제 1관문을 주흘관이라 하고 제 2관문을 조곡관, 제 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위 세 개의 관문 중 조곡관이 제일 먼저 생겼으며 (선조 27년) 제 1, 3관문은 100년 후인 숙종 때 시작하여 영조 때 완성하였다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장군이 왜군과 조령에서 대치하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서 싸우는 바람에 대패하는 전사가 있다.

 

신립은 부장들이 산세가 험한 조령고개에서 싸우자고 건의하나 신립은 한사코 넓은 탄금대를 고집하였고 이에 대패하여 왜군을 저지하지  못하자 선조는 1592년 4월 한양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하게된다. 

                             

양을 지키지 못함에 경복궁 창덕궁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재가 화마에 휩싸여 소실하게 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 듯 임진왜란 후 영남대로에 3개의 관문을 지었지만 후세에 전쟁에 쓸모없는 관광자원으로 남겼다.

 

조령에 가면 그 당시 신립장군의 아쉬운 대처가 문득문득 가슴을 친다. 탄금대에 가면 신립장군의 동상과 만날 수 있다.

              

 

  영남대로 과거길

      

남대로의 문경새재를 조령고개로 표기하기도 한다. 영남에서 과거를 보러 한양 가는 선비들은 반드시 문경새재 길을

택하는데 여기에는 웃지못할 사연이 있다.

 

황간의 추풍령길이 있으나 이 길로 가면 과거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이 길을 피하였으며 풍기의 죽령길이 있지만 이 길로 가면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 해서 가운데 길인 문경새재 길을 이용한 것이다.                                     

 

마패봉 / 사진 캡쳐

 

마패봉은 조령산에 붙어 있으며 산 중턱에 박문수 소나무가 있다. 박문수 나무란 암행어사 박문수가 마패를 걸어놓고 쉬었던 나무이다.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많은 유명인사가 있지만 박문수가 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인간미에 있다. 

그는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영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는데 37세 때 암행어사로 약 2년간 활동하였다. 그는 백성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배고픈 사람에게 식량을 주고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고 하물며 시집 못간 노처녀 혼사 문제까지 해결해 주니 박문수의 행적이 백성들 간에 확대 재생산 되어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 암행어사 이야기*  

사료에는 암행어사 제도가 중종 때 부터로 되어 있지만 미비하였던 것 같고 본격적으로 명종이후 조선말까지 600명의 기록이 있다. 암행어사로 지명이 되면 봉서, 사목, 마패, 유척을 숭례문 밖에서 지급 받게 되고 봉서를 보고 임무에 들어간다.

 

봉서에는 신분과 임무가 적혀 있고 마패에는 말이 한 마리 부터 10마리 까지 그려져 있어 그 숫자 만큼 말을 빌릴 수 있다.

 

암행어사는 마패를 해당 역참에 밝히고 말과 역졸을 지원 받는다.  박문수는 3개의 말이 그려진 마패를 이용하였다.

사목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규정한 책자이며 유척은 놋쇠로 만든 검시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 

 

암행어사의 가장 어려운 점은 신분을 숨기는 일인데 신분이 밝혀져서 살해되는 경우도 있다.  역참이란 지금의 지방 역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역참제도가 있었다.

 

역참에서는 말과 역졸을 준비하고 있어 공무로 출장 가는 관원이 마패와 신분을 밝히면 말과 역졸을 빌려준다.

 

역졸이란 동원의 포졸과 달리 역참에 소속되어 있는 군졸로 암행어사 출도 명령을 도와준다.  역원이란  각역참에서 관원들의 숙박을 제공하는 곳으로  대표적인 역원으로는  황해도 사리원, 충청도 조치원, 경기도 장호원등이 있다.  

 

                       KY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