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산 의릉에서 홍릉까지
제 472회 산행
산행지 : 천장산 산책길
산위치 :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산행일자 : 2022. 12.10. 토
산행인원 : 12명
천장산은 동대문구 청량리동, 회기동, 이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풍수지리상 명당터로 손꼽히는 장소라 하여 “하늘이 숨겨둔 산”을 의미 하여 천장산(天藏山)이라 이름 지었다.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 왕가의 묘지로 조성되었다.
의릉은 조선 20대왕 경종의 묘이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났으며 재위 4년 동안 병약하여 자식을 보지 못하고 35세의 나이에 이복 동생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조용히 묻혀있다
재학생도 점점 줄어들고 한국에서 예술 자체가 비주류인지라 웬지 쓸쓸하게 보여 가슴이 먹먹하다
정상 공터에 자리잡고
즐거운 마음으로 술잔이 오갔지만
63산악회 초유의 사태가 ~~~
먹다 말고 부랴부랴 짐을 챙긴 이유는?
군부대 출입구라며 군인들이 나와
자제를 권유했기 때문이었죠
먹다남은 음식을 처리하기 좋은 벤취 발견!
다시 배낭을 풀다
이렇게 살아 가겠노라
민비 시해사건 그리고 그후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경복궁 담을 넘어간 일단의 일본인 패들이 광화문을 열어 제치자 일본군과 낭인들이 우루루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들어간 민간 복장의 일본군은 민비 처소로 돌진하며 옥호루로 향했다. 궁내에 있던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서둘로 민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민비와 궁녀들 은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일본인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민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가로 막았다. 이경직의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 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고 말았으니 흉도들은 미리 소지하고 있던 민비사진과 민비 시체를 대조 하였다
우직한 이경직은 흉도가 내려치는 칼날에 양팔목이 잘려 중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죽었다.
민비는 옥호루 뜰 아래로 뛰쳐 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 졌으며 흉도들은 민비의 가슴을 짓밟으면서 일본도를 휘둘러 수 차레 내려 쳤다. 흉도들은 민비의 죽음을 확인하고 몇몇 궁녀들의 시체와 함께 숲으로 끌고 가서 석유를 뿌려 시신들을 불태웠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일본인들은 유유히 광화문을 빠져 나갔다.
민비는 재위 29년 째, 향년 43세에 경복궁 옥호루에서 일본인들에 무참히 시해 되었다.
친일 김홍집 내각은 민비의 시호 책정 등으로 장례 일정을 두 번이나 중단한 끝에 2년이 지난 1897년 비로소 시호를 명성이라 하고 능호도 홍릉이라 짓고 장례식을 치루었다
조선 군주의 아내였음에도 장례일정이 2번 이나 중단되는 바람에 2년 동안 사망자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취급받아야 했던 비운의 민비는 두고 두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민비는 비로소 명성왕후로 추존되었으며 고종이 황제로 승격하자 1919년 고종과 합장하면서 명성왕후는 명성황후로 추숭 되었다
명성황후는 22년만에 청량리 홍릉시대를 마감하고 고종황제와 함께 금곡의 홍릉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홍릉 석물에 앉아 인증샷을 찍어
결례를 범한 여인은?
러일전쟁 후 1905년 미국 25대 시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한제국을 방문하였을 때 영부인을 수행한 미국 여성이 홍릉재배 시에 촬영했다 전해진다
민비가 시해당한 옥호루 뜰
합장 이장된 홍유릉을 가보자
홍릉과 유릉이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홍유릉으로 합쳐 부른다
영원에는 영친왕과 이방자가 합장
묻혀 있으며 회인원에는 영친왕의
둘째 아들 이구가 묻혀있다
마지막 저 계단만 내려오면 합류
회기로를 따라 뒤풀이 장소로
홍릉이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하자 고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영친왕은 생모 엄씨를 영휘원에 모셨다. 영친왕은 부인 이방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진이 어렸을 때 죽자 아들을 할머니 옆으로 묻어주고 묘 이름을 숭인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영친왕은 이방자와 함께 아버지 고종이 묻쳐 있는 홍유릉 내 영원에 잠들고 계신다. 비록 홍릉은 금곡으로 옮겨갔지만 황가의 자손이 여기에 묻혀있음에 오늘날에도 이곳을 홍릉이라 부르고 있지 않나 추정해 본다.
회기로에 방황 끝에
흑염소탕집을 택하다
직접 서빙에 나선 전 회장님
이구동성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케이와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