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산하

하회마을에서 회룡포까지

케이와이지 2018. 9. 18. 13:11

안동 하회마을을 가다

위치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부용대에서 내려다 보인 하회마을

 

부용대는 하회마을 강 건너 해발 64m의 절벽이다. 부용대 단애에서 하회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사람들이 찾는다.

 

안동역

안동은 원래 고창군이었다.

고려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인 이곳에서 자웅을 겨룰 때 이곳의 귀족인 삼태사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쳐 고려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왕건이 동쪽에 안정을 취했다하여 고창에서 안동으로 지명을 바꾸었다. 

 

삼태사비

삼태사라 함은 안동 귀족 김선평, 권행, 장길을 말한다. 김선평과 권행은 원래 경주 김씨이고 장길은 중국에서 태어나서

중국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세 명이 왕건을 도와 견훤 부하 8천명을 죽이고 승리하자 왕건이  이들에게 그 공을 치하해 김선평에게는 안동김씨, 권행에게는 안동권씨, 장길에게는 안동장씨라는 성을 주었다. 이들을 안동의 삼태사라 부르고 각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원래 풍산읍에 있었으며 이름이 풍악서당이었다. 풍악서당이 도로변에 있어 시끄럽다하여 유성룡이 자기 향리인 풍천면 병산리로  옮기며 이름을 병산서원으로 개명하였다     

 

유성룡은 21세에 도산서원에서 이퇴계의 가르침을 받고 고향에돌아와 병산서원을 개원하고 중앙 벼슬에 나가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문을 가르쳤다.          

 

옥연정사

유성룡은 195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하회마을 강 건너 부용대 아래에 있는 옥연정사에서 나머지 인생을 보내면서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징비록이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느꼈던 것을 기록한 것인데  미리 지난 일을 징계해서 뒷날 근심이 있을 것을 삼가한다는 뜻이다.

 

하회마을은 고려 초기부터 중기까지 허씨들이 살았다. 이 마을에서 허도령 이라는 사람이 하회탈을 만들었다하여 하회마을로 불리었으며 고려 중기에서 말기까지는 안씨들이 살았으며 조선 초기부터 풍산류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아래 10개의 탈을 허도령이 만들었다

 

 

 

 

                      

도령은 꿈 신으로 부터 10개의 탈을 만들라는 명을 받는다. 허도령은 신의 지시에 따라 작업장에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고 목욕 재개하고 전심전력으로 탈을 만들고 있는데 허도령을 사모하고 있는 여인이 허도령이 너무 보고싶어 얼굴이나 보려고 몰래 휘장을 뚫고 허도령을 엿보았다.

 

허도령은  9개의 탈을 만들고 마지막 10번째 탈을 만들려는 순간이었다. 여인이 휘장을 통해 허도령를 보는 순간 허도령은 10번 째 탈을 완성하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죽는다. 10번 째 미완성의 탈이 턱이 없는 병신탈이다.

 

총 10개의 탈을 만들었으나 1개는 도난 당하여 전해지지 않고  9개만 전해지고 있다.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만들며 이곳에는 오리나무가 많이 자란다.

 

 

하회마을에서 회룡포로 간다

귀경길에 들린 회룡포

                           

<유성룡과 이순신의 인연>  

유성룡이 우의정으로 있을 때 국난을 예견하고 당시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여수)로 천거하여 인연 맺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2년 전이었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명에 따라 거북선을 제조하기 시작하여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을 완성한다.

유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없었고 이순신이 없었다면 유성룡은 임진왜란 역사의 기록에서  빠졌을 것이다.

 

                    KY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