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원효가
바람 많은 가을날 원효가 있는 곳으로 아들 설총이 찾아 갔다. 자기를 버린 비정한 아버지에게 설총은 무엇을 바라고 찾아 갔을까?
원효는 빗자루를 던지며 절 마당을 쓸라고 했다.설총은 마당을 쓸고 쓸었지만 낙엽은 내리고 또 내려 빗질한 곳을 덮고 또 덮었다.
설총은 한없는 원망과 의문으로 원효를 응시하자 원효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것이 너와 나의 인연이라고 …..인연이란 아무리 지우려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고 …..
위 글은 예전에 읽었던 월정스님이 쓴 에세이의 한 부분이다.
원효가 설총에게 던진 인연이란 무슨 의미일까?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서라벌을 떠돌아 다니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누가 나에게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지 않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는 원효가 여자의 정에 몸이 달아 있음을 실토하는 표현인데 이를 간파한 무열왕은 요석궁에 있는 둘째 딸인 과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준다.
원효의 장담대로 하늘을 받칠 기둥이 아들 설총이었다면 원효가 말한 인연이란 요석공주와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내 안의 원효는 나이 45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 길을 떠나지만 도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해탈을 했다며 서라벌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원효가 무엇을 깨닫고 다시 돌아왔는지 잘 모른다. 깨달음의 경지는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은 그 꽃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꽃을 설명으로 보여주려 한다면 설명하면 설명할 수록 그 꽃의 실체와 멀어지는 것과 같다.
북한산에 가면 북한산성 대서문을 사이에 두고 원효봉과 의상봉이 나란히 우뚝 솟아 있다. 신라시대의 두 거승이 북한산에 와서 수도를 하였다하여 이름을 붙여준 것인데 원효는 원효암 토굴에서 수도를 하였다 하여 그 봉우리를 원효봉이라 하고 의상은 국녕사에서 수도를 하였다하여 그 봉우리를 의상봉이라이름을 붙여주었다.
원효는 어두운 토굴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면 의상은 국녕사 사찰에서 수도 한 것도 두 거승의 다른 점이다.
원효는 자기를 철저히 버림으로써 서민불교를 일으켰다면 의상은자기의 신분을 이용하여 귀족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는 점도 비교된다.
의상은 자기의 지위에 걸맞게 전국에 수많은 사찰을 세웠지만 원효가 세운 사찰은 남양주 백봉산의 묘적사만 기억날 뿐이다.
당나라 유학 길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 온 원효는 철저히 무애 생활을 하면서 천민과 어울리며 고기 먹고 술 마시고 기생과 몸 섞이며 자기를 무참히 내 던지면서 자기만의 불법으로 천민 속을 비집고 들어가 불법을 전파했다.
그 당시 승려의 신분은 귀족과 다름없거늘 원효는 무엇을 깨달았기에 승려의 틀을 벗어 던지고 무애의 길로 들어섰을까!
불교에서는 원효의 깨달음을 집대성하여 원효사상이라 부른다.
세상에는 새로운 것을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선각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 아는 방법과 자기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교육이나 책자 등 여러가지 형태로서 누구나 가능하지만 후자는어지간한 범인으로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석가가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되어 불법을 만들었다면 원효도 스스로 깨달아 원효사상을 만들었으니 부처와 동열에 설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이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원효의 깨달음과 인연을 내세운 불법은 최초 석가로 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원효사상에서 나를 얻고 있다. 작가 최인호도 천주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아직도 나는 스님이 되고 싶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불교를 믿지 않는사람도 산에 가면 사찰을 들여다 보듯이 나 역시 산에 가면 사찰을 들여다 보고 스님과 대화도 하면서 잠시나마 불도가 되기도 한다.
원효가 나에게 준 원효사상이 내 안의 부처가 되어 나를 이끌어 주는 것은 아닐까!
KY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