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 2021년 4월 10일
산 위치 : 서울시 수유리
산행코스 : 우이동 – 진달래능선 – 대동문 -
구천계곡 – 수유분소 - 단군산장
선린 63의 북한산 진달래능선 산행은 매년 4월이 오면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코로나 19의 방역의 일환으로 산행을 중단하였지만 오랫만에 비공식 산행으로 재개한 탓인지
참가 인원이 5명에 불과한 조촐한 산행으로 기록 되었다.
필자는 조총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일주일 만에 조총 애도의 산행으로 본인 나름대로 규정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로 향했다.
본류는 이미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진달래능선으로 올라챘을 것이다.
필자는 개인사정으로 하산 길의 구천계곡 상류에서 본류와 합류하여 구천폭포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남겼으며 만년 B팀 윤박사는 아카데미탐방센터에서 최종 합류하여 그나마 작은
완전체가 비로소 성립되었다.
구천폭포
대동문에서 수유동 방면의 아카데미탐방지원센터로 흐르는 구천계곡 안에 있으며 조선시대 채석장
자리이기도 하다. 단종비 정순왕후가 누워계신 남양주 진건읍의 사릉을 조성할 때 이곳에서 석재를
채취했던 채석장임을 증명하는 부석금표가 있다.
아카데미하우스
1966년 11월 고 강원용 목사가 독일 교회의 후원을 받아 1만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현재의 아카데미하우스를 건립하였다. 1980년대에는 정치권의 회합, 각종 교육장소와
숙박시설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1988년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3김의 회동 장소로
널리 알려졌다.
2004년에 한국기독교 총회가 120억 원에 인수하여 운영에 들어갔으나 적자가 누적되어
한때는 260억 원의 매물로 나왔지만 매수자가 없어 현재는 임대공고를 내놓은 상태다.
보증금 10억, 월 임대료 5천이며 임대 기간은 10년으로 되어있다.
순국선열묘소 순례길
이곳에는 3.1운동을 주도했던 손병희, 초대 부통령 이시영, 이준 열사, 김병로, 성균관대학을
창립한 김창숙, 김도연, 신익희 등 수유리와 우이동 골짜기에는 유독 순국선열들의 묘가 산재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여 수유분소 관계자에 묻자 이곳의 땅의 기운이 세기 때문이라며 수려한
삼각산의 줄기가 내려와서 둥지를 틀어 기운이 내려앉는 곳이 수유리와 우이동이라 말한다.
4.19 민주묘지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라 생각하면서 본류에 전화를 하니 대동문에서
점심을 하고 있다는 회답을 듣고 시간도 부술 겸 모처럼의 여유로움으로 이준 열사의 묘소라도
참배해야겠다 싶어 발길을 옮겼다.
사람이 산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다.
- 이준 열사 유훈 중에서 -
이준열사 (1859.1.21. ~ 1907.7.14.)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평리원 검사 출신이다.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첩보를 얻은 이준열사는
고종에게 조선의 현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특사를 헤이그에 보내자고 건의하여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고종은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정사로 하고 이준열사를 부사, 러시아대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특사로 구성하고 특파한다. 그 당시 이준은 48세로 나이가 가장 많았다.
이준열사는 한양에 있었지만 이상설은 연해주에 있었고 이위종은 러시아에 있었다.
1907년 4월 22일 이준은 가족들과 고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서울역을 출발하여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출발하여
프랑스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한 것은 6월 4일이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이위종과 합류하였다.
비로소 완전체가 된 3명의 특사는 공고서의 원고를 작성하고 이를 불어로 번역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6월 19일에 출발하여 헤이그에는 6월 25일 도착하여 De Jong
호텔에 투숙하였다. 이준이 부산항을 출발한 지 2개월이 약간 지난 긴 여정이었다.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었는데 당시 참가국은 49개국이었으며
대표는 약 247명이었다. 3명의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언론에 공개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하였지만 열강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영국과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준은 격분을 금치 못하고 연일 애통하다가
1907년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호텔에서 순국하였다.
당시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훗날 자결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이상설과 이위종의 노력으로 이준열사의 유해는 순국 후 3일 만에 헤이그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
되었으며 장례식은 묘지 영구사용료를 지불한 9월 6일에서야 이루어졌다.
이준열사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만인 1963년 10월 4일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북한산 자락 선열묘역에 안장하였다.
오작교 건너에 단군산장!
이준열사와 작별하고 김병로 묘소를 들러 구천계곡 하류를 맴돌다 단군산장을 찾아냈다.
단군은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서 우리 민족의 시조이며 고조선의 첫 임금이다.
순국선열의 묘가 산재한 곳에 과감히 단군을 소환하여 단군산장이라 이름을 지은 주인의
얼굴이 궁금하여 작은 오작교를 건너 꽃나무에 둘러싸인 경관이 좋은 단군산장 경내에
들어섰다. 일반적으로 좋은 음식점의 주인은 여성이듯이 단군산장의 주인도 여성이었다.
靑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