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에서 역사를 배우다
일자 : 2011년 10월 8 - 9일
내용 : 1박 2일 테마산행
첫 째날
거제도는 남한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위 그림에서 보듯 왼쪽에 작은 다리가 구거제교이고 오른 쪽이 신거제대교이다.
한산도대첩
1592년 7월 8일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견내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바다를 점령하게 되었고 이로서 바다에 의존한 일본은 식량보급이 끊겨 전쟁을 소강상태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견내량해전을 훗날 한산도대첩이라 불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선 7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서 호남을 향해 서진하기 위해 거제 앞바다 견내량에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판옥선 49선을 몰고 출동한다
그러나 견내량의 폭이 180m 밖에 안되어 전투 중 왜병들이 통영이나 거제도 등 육지로 도주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적을 넓은 곳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판옥선 3척을 견래량으로 보내 유인작전을 써 와키자카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이 작전에 참가한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 작전에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의 설득으로 참가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끌고 온 9척의 함선과 합류한 이순신은 한산도 뒤 바다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선이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책으로 다다르자 이순신은 순식간에 학익진으로 왜선을 포위하고 왜선 70여척을 전멸시킨다.
이를 우리는 한산대첩이라 하지만 그당시 한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이름도 없는 무인도이기에 그 당시 이 해전을 견내량 해전이라 불렀다
전공을 세운 후 이순신은 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통제부를 설치하고 부터 민간들이 살게 되어 한산도가 알려지게 되게 되었고 그 후 이 해전을 한산대첩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전투로 왜장 와키자카는 혼자 겨우 몸을 피해 한산도에서 나무뿌리로 연명하다 구출되어 부산 본진으로 돌아갔다.
거제수용소의 비극
거제도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포로수용소는 이제 유적공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3개의 전선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전선이 거제 포로수용소였다.
3개의 전선이란 전방의 피아간의 전투지역인 전방 최전선이고 또 하나는 후방의 빨치산인데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 빨치산이다. 그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는 어찌하여 전선으로 불릴 만큼 피아가 치열했을까?
수용소는 세계 2차대전 이후 포로의 생환을 목적으로 제네바 협정에 의해 설립된 제도인데 수용소 설치장소는 3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 째는 포로가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선과 멀어야 하고 둘 째는 거주지의 인구가 적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식수와 식량재배가 가능한 곳이어야만 했다.
거제도는 이러한 요건에 충족하다고 판단되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거제도 인구는 10만명이었다. 그러나 흥남 부두와 기타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이 20만 명이고 포로가 17만 명이니 하루 아침에 거제도는 47만 명이 사는 거대한 섬이 되고 말았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미국이 제네바 협정에 의거 먼저 제안한 것인데 수용소를 설치하여 수용된 친공 포로들을 전향시켜 소련의 공산체제 보다 더 위에서려는 심리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향 작전도 쉽지 않고 수용인원의 5배가 될 정도로 대우가 매우 열악하여 자주 폭동이 일어나고 그 와중에 수용소 소장인 로드준장이 납치당해 3일 만에 풀려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또한 매일 친공과 반공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하룻 밤 사이에 수십명이 죽어 나오는 경우가 있어 할 수 없이 막사를 친공과 반공으로 분류하여 수용하기도 하였다.
흥남부두에서 피난 온 피난민들은 전쟁 후 거의 부산으로 건넌가 정착하였으며 서울에서 피난 온 사람들은 보따리를 싸 들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포로 석방 협상이 시작되고 북한은 자동송환을 원했고 유엔군은 자유송환을 주장하는 와중에 이승만은 자유송환의 일환으로 반공포로 28,000명을 석방하였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그 보복으로 북한이 수용하고 있는 국군 포로 총 80,000명 중 3만 명을 살해하고 겨우 8,000명을 남한으로 송환하였으며 나머지 4만 명은 돌려보내지 않고 노동현장이나 북한군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승만의 오판으로 수 많은 국군장병들이 고국으로 돌아 오지 못하는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 당시 국군포로는 압록강 근처인 중강진 (현 자강도)에 설치된 중강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겨울에는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 견뎌야 했으며 전선에서 포로로 붙잡히면 차로 이동하지 않고 걸어서 이동해야 했기에 그 행군이 제일 힘들었다하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스스로 목숨을 던지기도 하고 행군에 처지면 사살 당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거제도 수용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열악한 여건 속에 우리 국군포로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휴전 후 국군 포로의 실상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폐쇄되었으며 1999년 10월에 수용소 터에 거제시가 수용소 유적공원으로 건립하였다.
수용된 포로들 중에는 남 또는 북을 택하지 않고 제 3국으로 간 사람도 90명이 되는데 제 3국을 택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거제 포로수용소의 실상을 기록한 책을 발간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둘 째날
오늘은 외도 가는 날이다.
거제도를 떠가기 전에 거제도가 자랑하는 외도에 갔다. 외도는 해금강에서 4km 떨어진 거제도의 주변 섬으로 서구식으로 갖추어진 식물원으로 보면 된다.
섬 전체가 아름다운 서구식 환경으로 꾸며져 있어 퍽 인상적이었으며 가꾸는데 꽤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샅샅이 구경하며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가이드에 의하면 1969년 서울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이창호라는 사람이 이 근처에 낚시를 왔다가 마치 태풍을 만나 우연히 외도에서 하룻 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이 섬에 매료되어 3년에 걸쳐 섬 전체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 후 부부가 내려와 둥지를 틀면서 30년 넘게 이 섬을 가꾸었다하니 젊음을 이 곳에 고스란히 바쳤다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훗날 우리들에게 자연의 멋스러움과 낭만, 애환, 여행의 즐거움을 준 부부에게 감사함을 보낸다.
KY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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