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산하/한국 100대 명산 완등기록

황매산에서 청학동까지 (100대 명산)

케이와이지 2018. 10. 25. 22:56

산이름 :  황매산 (  1,113 m )

산위치  : 경남 합천군 기회면

일자 : 2012년 25 ~ 26일 1박 2일 테마산행

교통편 :  42인승 버스대절 /

참조 : 63동창회 박회장님의 세 번째찬조

 

 

황매산은 경남 산청에 있는 한국 100대 명산이다.

산청은 물이 맑아  지리산의 산청이라 알려져 있지만 의류 역사의 혁명을 이룬 땅이다.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과 목화재배를 성공한 땅으로서 한국 최초의 목화 재배단지가 조성 되었던 곳이 경상남도 산청이다.
 
 

 

문익점은 진주가 고향으로 정몽주와 함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정계에 진출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순제의 노여움을 사 강남지방의 운남성으로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목화씨를 모아 귀국할 때 붓 뚜껑에 10개를 넣어 가져왔으며 장인이 진주에서 목화씨 9개 째 심었으나 말라 비틀어져 실패하고 마지막 1개를 산청에 심어 성공했다.
 
일부 사학자들은 문익점이 몰래 목화씨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그 당시 원나라의 금수 품목은 화약이나 무기류였지 목화는 아닐 것이라 주장하고 아무나 목화씨를 가져왔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조실록에도 문익점이 붓 뚜껑이 아닌 주머니에 많은 목화씨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붓 뚜껑에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후세에 목화의 덕을 본 사람들이 문익점의 공을 높이기 위해 과장해서 표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문익점은 누구인가?
그 당시 공민왕은 배원 정책을 썼기 때문에 원나라 순제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책봉했는데 이에 복위를 위해 공민왕은 문익점 등을 원나라 사신으로 보냈으나 순제는 오히려 이들을 유배를 보낸다.신변에 위험을 느낀 문익점은 덕흥군의 편에 서서 공민왕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공민왕에 의해 낙향을 하게 된다. 조정에서는 문익점을 두 왕을 모셨다하여 처형하려 하였으나 목숨만은 건져 고향 진주로 돌아와서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혁명을 일궈낸다.
 
 
 

청학동 도인촌

 

청학동 도인촌은 지리산 남쪽 삼신봉 자락에 있으며 해발 800m이다.

신라의 고운 최치원이 은거한 곳이고 도선국사가 명지로 가르킨 곳이라 하여 예부터 많은 도인들이 거주한 곳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상상속의 푸른 새인 청학이 사는 곳을 동경하였는데 이곳이 전설에 맞는 지형이라 하여 6,25전쟁 이후 일부는 계룡산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청학동으로 들어와 집단 거주하면서 자급자족으로 생활하고 있다.
 
유불선이라는 신흥종교를 신봉한 이들은 하얀 한복을 입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학교대신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다.   
문명의 변화에 지금은 현대화되어 가는 청학동을 찾는 이에 실망감을 준다.
 
 

 
청학동 삼성궁은 묵계리 출신 강민주(한풀선사)가 1983년에 고조선시대의 소도를 복원한다며 삼성궁을 지었는데 삼성궁은 사찰의 삼신각처럼 환인, 환웅, 단군 등 세 분을 모시는 사당이며 한풀선사가 수행자들과 선도를 지키고 신선도를 수행하는 도장이 삼성궁이다.


강민주는 이곳이 소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솟대를 1000개나 세웠는데 솟대 대신 돌탑을 세우기도 한다.
             
소도는 고조선시대 천신을 제사 지낸 지역의 명칭으로 큰 나무로 된 솟대를 세우며 신성지역으로 선포하고 국법의 힘이 못 미치게 하여 죄인이 이곳에 도망쳐오더라도 돌려보내거나 잡아 갈 수 없어 도둑이 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수행자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새벽에 삼법수행을 하고 해맞이 경배를 드린 뒤 선식으로 아침을 먹고 전통무예인 선무를 익히며 오후에는 솟대를 세우려 돌탑을 쌓거나 밭은 일구고 저녁에는 법문을 공부한다. 1년에 한번 가을에 개천대제를 할 때 일반인에게 공개하는데 한풀선사와 수행자들이 무예를 보여준다.삼법이란 마음공부, 기공부, 몸공부를 말한다. 즉 止感, 調息, 禁觸을 말한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는 박경리 토지의 무대이고 주인공 서희아씨가 사는 최참판댁이 있는 것으로 묘사 되지만 평사리에는 실제 최참판댁은 없다.  
 
박경리는 평사리를 무대로 쓰면서 한 번도 이곳을 찾지 않았으며 섬진강을 끼고 있는 악양면 평사리의 지리적 배경을 소설자료로 참고 하였을 뿐이다. 토지에서는 평사리를 넓은 마을로 표현했으나 실제 평사리는 그다지 너른 마을이 아님을 실제 방문하면 알수 있다. 박경리는 훗날 최참판댁을 찾아 지리산을 깎아 낸 것을 미안해했다고 전해졌다. 
  
평사리는 현실이 소설이 된 것이 아니고 소설이 현실이 된 곳이다. 실제 없었던 최참판댁을 하동군이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지리산 자락에 100년 후를 생각하고 2001년 건립하였다.


100년 후에 우리 후손들은 이곳에 들러 박경리의 최참판댁이 바로 이 곳이구나! 라고 믿는 시대가 올 것이다.
 
작가 박경리는 2008년 5월 원주에서 사망하였으며 경남 통영출신이다.진주여고를 졸업하고 문학의 꿈은 상주해수욕장에서 키웠다. 토지는 25년에 걸쳐 집필하였으며 1부는 현대문학에 연재 하였고, 2부는 문학사상, 3부는 주부생활,4부는 정경문화, 5부는 1994년 월간경향에 완결 총원고지 4만장이 소요 되었다.토지를 원주에서 완결하였기에 박경리 문학관은 하동에 있지 않고 원주에 있다.
 
                            KY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