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산하/한국 100대 명산 완등기록

황석산에 부는 바람 ( 100대 명산 )

케이와이지 2017. 12. 8. 13:24

산이름 : 황석산 ( 1,192m )

산위치 :   경남 함양군 서하면

산행일자:  2011년 6월 24일

교통편 : 42인승 버스대절

 

황석산 정상


1597년 8월 15일 오전 9시,
황석산 산허리에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어제처럼 짙게 깔려있다. 적을 앞에 두고 하물며 십 배나 되는 적을 두고 어찌 두려움이 없겠는가. 황석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왜군이 75,000명이나 된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병사들은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군관의 지시 하에 일사분란하게 활과 창을 점검하고 있다.


아군은 고작 7,000명에 불과한데 그나마 여자들과 전투력이 없는 노인을 제하면 실제 전투병은 6,500여명 남짓하다.

여자들은 주먹밥을 짓고 노인들은 돌을 주워 모으느라 여념이 없다. 지난 임진년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이 돌 공격으로 왜군을 물리친 전과를 모를 리 없는 황석산 전투병들이다. 성벽 밑에서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 하는 것은 돌을 굴러내리고 끓은 기름을 쏟아 붓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 단순히 숫자상으로 봐도 아군 1명이 왜군 10명을 죽이고 전사한다
하여야 비기는 전투이다. 러나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 결전의 아침을 맞이한다.

황석산은 경상도 함안에 있으며 한국 100대 명산 중에 하나이다. 100대 명산 완등을 목표로 지난하게 달려 온지 벌써 8년이 되지만 황석산이 96회 째이니 아직도 4산이 남은 셈이다. 인간사라는 것이 참 묘해 채우려는 것은 다 채워야 직성이 풀리고 다음을 나갈 수 있다.


산이 정해지면 그 산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출발 전에 습득하는 것이 오래된 나의 습관인데 황석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역사문헌을 훑어보다 황석산 전투의 비극을 접할 수 있었다.

황석산 산허리에 뿌려진 선조들의 피빛 비명소리가 뒤범벅되어 잠 못 이루게 하더니 배낭을 챙겨 메고 새벽을 나서니 언제냐 싶듯 쾌청한 6월 초의 상큼함이 온 몸에 쏟아진다.


100대 명산이 종료되면 무엇이 나를 기다릴까?

명산의 둘레길?  아니면 섬 여행 ?

아니면 규슈올레길 ?

양재역을 출발한 나의 밋쓸버스는 고속도로 오른쪽을 점거하며 남으로 남으로 달려간다.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왜병선이 부산 앞바다를 뒤 덮었다.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를 평정한 풍신수길은 전쟁이 없어져 낭인이 된 무사들이 혹시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해 명나라 정벌이라는 미명하에 길을 터라며 조선반도로 밀고 들어 온 것이 소위 임진왜란이다. 조선반도를 유린하고 피로 물들인 후 명나라와 화의하고 일단 철수 하지만 화의를 깨고 이듬해 다시 출정한 것이 정유년에 일어났다해서 정유재란이다.

임진년에 이어 1597년 이른 봄 5년 만에 다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왜군은 총 14만 명이며 수군을 포함에 2만 5천명은 부산 인근에 진을 치고 주로 보급과 경계를 담당하였으며 나머지 11만 5천명을 좌군과 우군으로 편제하여 좌군장 우키다는 4만명을 거느리고 임진년과는 다르게 곡창지대인 호남도 예외 없다며 남원성을 향해 진군하고  우군장 모리데루모토는 7만 5천명을 이끌고 화왕산성을 단숨에 치고 충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할 요량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 몽진이라는 뼈아픈 악몽이 있는 선조왕은 경상도 체찰사 이원익에게 충주를 못 넘게 어떻게든 함양에서 적을 막아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원익은 함양현감, 산청현감, 안의현감에게 각각 균등하게 군관민을 차출하라는 지시를 하자  세 현에서 모집한 수가 7,000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을 황석산성에 집결시켰다. 무더운 1597년 8월 15일이었으며 왜군 75,000명에 턱없이 부족한 조선병력이었다. 이름하여 역사에 길이 남는 황석산전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사방댐


양재역 출발 3시간 반 만에 산행 들머리인 함양 우전마을에 도착했다. 예부터 소와 밭이 많다하여 우전마을이라 이름 지었다는데 소들은 보이지 않고 경사를 이룬 넓은 밭에 과수목만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옛날에는 전형적인 산골마을 이었겠지만 언제부터인지 근현대식 주택이 버젓이  들어서 있고 집집마다 방범시설이 설치되어 산골마을이라 부르기에는 약간 조심스런 표현이다.




산행 안내도


산행 안내판이 있는 사방댐까지는 산꾼들이 제일 싫어하는 지루한 포장길이  30여분 이어지다 길모퉁이를 도니 바로 앞에 황석산 마루금이 시야에 잡힌다. 산행 할 때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이 만치 있으면 산은 항상 저 만치 있기

마련인데 당일 컨디션과 날씨가 변수가 되어 산은 뒤처지기도 하고 앞서기도 한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언제가 목표치에 도달하지만 단순한 인간은 그것을 망각하고 단숨에 해치우려다 보니 야! 오늘 산행 힘들었어 하고 푸념들  하곤 한다. 인내와 지구력이 산행의 기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 소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아름다은 사방댐의 풍광을 뒤로 하고 오늘의 산행 들머리에 들어섰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군은 왜군의 진군이 예상되는 마을은 철저히 파괴 또는 태워서 어느 것 하나라도 적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은 인근 성에 피신케 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황석산성도 전투력이 없는 부녀자가 많았던 것을 보면 그 연유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른바 소개작전 이라는 것인데 이 작전은 면면히 흘러 내려와 6.25전쟁 때도 사용되어 수많은 양민들이 빨치산들에게 희생되는 통한의 작전으로 변질 되었다.

8월 15일 시작한 전투는 5일간이나 지속되었고 성이 함락되자 여자들은 왜병에게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며 북벽 벼랑에서 뛰어 내린 사람이 500명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그 북벽 바위를 피바위로 부르고 있다.
황석산 전투에서 아군 7,000명이 전멸하여 패전이라 말하지만 역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왜군도 48,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하여 그나마 전투력을 갖춘 병사는 고작 27,000명 이었고 이 전투로 인하여 전쟁 종식의 빌미가 된 점으로 봐서 황석산전투는 패전이 아니라 승리한 전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피바위

 

피바위



가파른 너덜지대를 지나자 등산로에서 벗어난 지점에 피바위가 나뭇가지 사이로  하얗게 모습을 드러낸다.
망설임 끝에 바위라도 만져보고 싶은 마음으로 피바위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보기 보다는 바로 눈앞의 피바위는 거대한 암릉 덩어리였으며 어머니 살갗 같은 매끈 매끈한 바위를 만지자 울컥 눈물이 났다. 빨간 피로 물들여 있어야 할 바위가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이렇게 하얀 바위로 변질되어 420년을 이어왔다.

바위에 걸터앉아 배낭에 담아 온 막걸리 한 병을 꺼내 세라컵에 따른다. 그리고 피바위에 뿌렸다. 두려움, 통한, 설음 ..... 이제는 잊을 지어다 ! 문득 남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전날 출발한 거망산 기백산 금원산 종주팀이 생각났다. 그렇지 1시에 남문에서 만나자고 했었지. 서둘러야겠다.

 

황석산성


지름길인 끊어진 성곽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30분 알바를 하고 보니 더더욱 시간이 지체되어 시간을 지키지 못해 신뢰를 잃은 것은 물론 많은 땀의 댓가를 치러야 했다. 다음부턴 산에서 시간을 정해 놓고 만나자는 우를 범하지 말자. 마지막 깔딱을 올라서니 남문이 나타나고 좌우로 성곽이 연이어 있는 것이 마치 장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곽위에서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고 있고 그 한 켠에 종주팀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4박 5일간의 황석산 전투는 전무후무한 전쟁사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투를 독려하기 위하여 적군 코베기 명령을 내렸는데 왜병들은 자기의 전과를 증명하기 위하여 자기가 죽인 조선군 코를 베어내 허리춤에 주렁주렁 차고 다녔는데 다수의 왜병들은 죽은 왜병들의 코까지 베어 전과에 이용했다는 웃지 못 할 사건이 이곳 황석산 전투에서 특히 심했다는 역사적인 기록도 남아있다.

충주로 진격하려던 우군장 모리데루모토는 황석산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고 단일부대로서의 작전을 세울 수가 없어 급기야 27,000명의 잔 군을 이끌고 육십령을 넘어 전주성으로 향했다. 전주성에서 우키다와 합류하여 산발적인 전투로 일관하다가 남해가 이순신에 의해 패 되었다는 소식에 보급선이 끊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일부는 천신만고 끝에

부산으로 탈출하고 일부는 그 유명한 조선과 명나라 50,000명의 연합군이 왜장 가등청정에게 대패한 울산성 전투에 참여하기 위하여 울산으로 향했다.

왜선이 진도 명량해전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에 누운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해 생을 마감함으로써 제 2인자인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조선 철군 명령을  내려 전쟁이 종식되었는데 그 분수령이 황석산 전투이다.  

정상을 말한다


점심 후 드디어 황석산 정상에 섰다.
산은 커다란 모습이었고 억센 자태로 어디에 눈을 주어도 줄기차게 이어져 있다. 눈 가까이에는 기백산이 있고 눈 길 멀리는 덕유산의 웅장함이 힘으로 압도하는 영웅장처럼 힘차게 뻗어있다. 거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물결이 되어 자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다. 내쳐 달려가 거망산 까지 끝장을 보려는 강한 욕망이 솟구치지만 절제를 하는 것도 산 다니는 사람의 덕망이라 생각 되어 소동파의 시 한 구절로 달래기로 하였다.

“ 비껴 보면 산마루 모로 보면 산봉우리”
“ 원근고저가 하나도 같지 않네 ”

황석산은 한이 서린 산이다.
정상에서 느끼는 한의 정서와 애상의 정서는 크게 상반되어 다가왔다. 한국이 바라보는 일본, 일본이 바라보는 한국. 세월이 흘러 사람이 바뀐다 해도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역사에 매달려 한 걸음도 전진 할 수 없다면 이 또한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

일본은 우리 조상들이 겪은 한의 정서만큼은 우리를 보듬어 주어야 할 것이며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한의 정서를 미래의 정서로 자리매김하여 조상들의 그 아픔을 공유하여야 할 것이다. 황석산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고 국가를 위한 처절한 항쟁의 죽음이었기에 그들의 숭고함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뜨겁게 달아올랐다.
황석산에 부는 바람은 영웅들의 바람이었다.

                                                                          

                         KY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