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평야, 시야가 트인 망제, 일망무제 같은 평야!
남도의 넉넉함은 상다리가 부러진 음식상만이 아니다. 저 너른 평야에서도 나온다. 너른 평야를 뒤로하고 남으로 남으로 너른 들판에 하얀 비닐하우스가 장관을 이룬다. 마치 은빛 세상에 들어선 착각을 일으킨다.
영산포를 숨가프게 지나면 잿빛 들판 멀리 육중한 바위산이 갓띠를 두른듯 수려하게 다가온다. 너른 벌판에 어찌 저런 기암 기벽이 첩첩히 쌓여 자기 몸을 송두리 채 내보이는 것일까! 섬세함인가, 장엄함인가!
월출산은 이렇게 다가왔다가 강진읍에 들어서니 어느 듯 모습을 감추고 사방이 겹겹이 포개진 나즈막한 산 산 산으로 변한다. 이것이 남도의 또다른 맛이다.
주작산 능선이 끝나자 뭉툭한 두륜산이 이어 받는다. 두륜산의 마지막 능선이 바다로 빠지자 공룡의 등뼈같은 달마봉이 은빛색을 띤 연봉을 잇는다. 달마대사는 달마봉의 산등성이를 날카로운 톱니처럼 빚어가다가 문득 멈추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며 대한민국 최남단 땅끝마을을 만들었나!
어느새 완도대교를 지나 숙승봉 기슭을 휘감듯 돌아 정도리에 도착한다. 반들 반들 몽돌들이 돌잔치를 하듯 포말과 힘겨운 싸움을 한다. 찰싹 쏴 밀려오고 밀려가는 해조음은 바다의 교향악이었다. 발길은 나도 모르게 청해진을 향해 있었다.
궁복이는 저 청해진 앞바다에서 큰 꿈을 키우다가 신라의 신분사회를 비통해 하며 완도를 떠났으리라. 궁복이는 어린시절 장보고의 이름이다.
남도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조그마한 포구! 하얀 포말에 밀려 오는 진한 바다내음에 현기증이 난다. 때마침 불어오는 매서운 해풍에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 성숙한다 했던가! 남도를 돌다가 청해진 앞바다에서 역사에 젖어본다.
1998년 10월 5일
KY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