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사건의 배경
1968년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이 한창일 때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계속되자 베트남의 호치민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파병을 거절하고 그대신 남한 파병이 계속되지 않도록 남한을 도발하여 남북긴장을 고조시켜 한국군 파병에 혼란을 주겠다며 호치민을 설득하였다.
그 일환으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 124군 부대를 창설하여 한국의 심장부인 청와대, 육군본부, 주한미국대사관, 서울교도소, 간첩수용소 등 5개 주요기관을 습격 대상으로 설정하고 76명의 요원들에 특수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실행 직전 단계에서 5개 시설을 동시에 타격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정찰국장 김정태는 계획을 변경하여 청와대 1개 시설만 타격하는 방향으로 전환 서울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황해도 연산 6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31명의 요원들에게 그 임무를 하달하였다.

청와대 침투투조를 아래와 같이 4개조로 편성했다.
제1조 : 청와대 2층 / 박정희 대통령 살해
제2조 : 청와대 1층 / 제1조 지원 담당
제3조 : 경호실 타격
제4조 : 비서실 타격
생포된 김신조는 제2조 조장으로 밝혀졌다.
습격 시기를 연중 가장 추운 1월 중하순으로 정했는데 이는 혹한기에 한강과 임진강이 모두 얼어 침투와 복귀 시 도강에 유리하고 서울 시민들이 추위에 신경 써 그들의 어색한 행동을 눈여겨 보지 않을 것을 장점으로 생각했다. 20일 전후가 가장 춥다는 기상 예보가 있었다.
정찰국의 지령이 떨어졌다.
“1968년 1월 21일 20시를 기하여 청와대 건물을 폭파하고 대통령을 살해하라”
공비 침투경로(김신조루트)

1968년 1월 16일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배낭 1개씩을 짊어지고 황해도 연산에 있는 부대를 출발했다. 이들은 한국군 26사단 마크가 부착된 국군 복장을 했지만 실은 북한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요원들이었다. 이들에게 청와대를 습격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출발 하루 전이었다.
1월 17일 새벽
AK 소총 1정에 실탄 300발, 소련제 권총 1정, 수류탄 12발, 단검 1자루를 넣은 30kg 군장을 멘 무장공비들은 비무장지대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 8시가 되자 미 2사단 관할 지역의 정면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 10시쯤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연천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넜다.
1월 18일 오전 5시
밤새도록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은 끝에 새벽 5시 쯤 경기도 파주시 비학산 기슭에 도착하여 장비 등을 점검하고 파평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1박을 했다.
1월 19일 오전 5시
파평산에서 1박을 한 공비들은 파주와 법원리 사이 삼봉산으로 이동하여 영하 15도를 웃도는 강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후 2시경이었다. 마치 산으로 나무를 하러 온 우씨 형제 4명과 조우하자 그들을 생포했다. 남하 도중 누군가에 발각되면 무조건 죽이는 것이 공비들의 원칙이지만 일부 요원들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며 살해를 반대하였다. 살해할 것인가 살려줄 것인가 격론 끝에 반대하는 쪽이 우세하여 결국 우씨 4형제를 밤 8시경 풀어주었다. 물론 우씨 형제들의 신상을 적어두고 신고하면 본인은 물론 일가족을 몰살하겠다는 엄포를 해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김신조는 살해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한다.
밤 9시경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우씨 형제들은 가족 어른들에게 알리고 고심 끝에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으며 이 사실이 인근 군부대와 경찰서에 알려진 것은 밤 9시 30분경이었다. 그러나 우리 군과 경찰은 공비들이 서울까지 진입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가장 느슨한 경계령인 갑종 경계령을 발동했다.
한편 공비들은 나무꾼을 살려보낸 후 실수한 것을 깨닫고 북한 124군 부대 본부에 계속 임무를 수행할지 여부를 무전으로 물어보았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들이 가진 암호표로는 해독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일이 있어도 임무를 수행할 것을 다짐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남하를 계속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해독되지 않은 답신 내용은 ‘원대 복귀’였다.
당시 한국군의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의 경우 시간당 4km를 넘지 않았지만 공비들은 눈이 푹푹 빠지는 능선을 따라 시간당 10km씩 주파하여 양주 고령산(앵무봉)과 노고산을 지나 창릉천 건너 진관사로 진입하였다.
1월 20일 새벽 4시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진관사에 도착한 공비들은 진관사 계곡을 지나면서 군복을 벗고 배낭에 있던 민간복으로 갈아입었다. 당초 계획대로 민간복을 한 CIC 방첩대(현 보안대)로 위장한 것이다.
공비들은 밤새도록 질주한 끝에 오전 6시경 북한산 비봉에 도착했다. 비봉에서 아침부터 헬리콥터가 떠다니고 도로가 통제된 것을 확인하고 사모바위 아래 승가사 위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편 서울 일대에 비상경계령을 발동한 우리 군은 공비들이 아직은 서울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으로 오판하였다. 당시 수도권을 관장하던 6관구 사령관은 김재규 중장, 청와대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 대장은 전두환 중령이고 작전참모는 장세동 소령이었다. 11년 뒤에 일어날 10.26과 12.12의 주역들이다. 6관구는 1954년 창설된 제6군관구사령부를 약칭으로 부른 부대며 현 영등포구 문래공원에 주둔했으며 1974년 군제 개편으로 해체되었다.
1월 21일 밤 9시 30분 경
공비들은 당초 계획에 따라 1월 20일 오후에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북악산에 들어가 있어야 했지만 시간이 틀어지는 바람에 북악산 대신 세검정 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명대 앞 세검정 3거리 검문소에 다다랐다. 그들이 행군하는 군인처럼 2열 종대를 갖추고 침묵 속에 움직이자 검문소가 그들을 그냥 통과시켰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세검정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각현 서대문경찰서장은 군용 스리쿼터에 형사들을 태우고 자하문 고갯길을 올라가는 공비들의 대열 선두로 가서 차를 세웠다. 이서장은 괴한들의 정체를 물었으나 공비들은 “CIC 방첩대로 3일간 훈련을 끝내고 복귀하는 길이니 참견하지 말라” “신분증도 필요없다”고 반응하며 불쾌해 하자 이서장은 방첩대라면 경찰이라도 어쩌지 못할 만큼 위세가 등등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이 차를 빼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다음은 자하문(창의문)고개였다. 종로경찰서 관할의 자하문 임시검문소에서 공비들을 검문한 것은 종로서 소속 박태안.정종수 형사였다. 두 형사는 이들의 행군을 차단하며 소속을 물었더니 함경도 억양의 공비들이 “산에서 3개월간 특수훈련을 마치고 내려온 CIC 방첩대원들”이라고 말했으나 두 형사는 파주 쪽에서 발견한 공비들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수적으로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꾀를 내어 대열의 맨 뒤에서 따라가던 공비(김춘식)에게 말을 거는 둥 앞 대열과의 간격을 벌렸다. 공비들이 자하문 고갯길을 넘어 청와대에서 300m 거리의 경복고 후문 근처에 다다른 밤 10시 무렵 지프 한 대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종로경찰서 서장 최규식 총경이었다. 최서장이 권총을 빼들고 소속을 밝히라고 요구했다.공비들이 “CIC 방첩대 소속이니 길을 비켜라”면서 위협해도 최 서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였다. 시내버스 한 대가 자하문으로 올라오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최 서장이 타고 온 지프차 뒤에 멈춰 섰다. 잠시 후 또 한 대의 시내버스가 커브를 돌아 나오다 앞 차량이 멈춰 서있는 것을 보고 급정거를 했다. 공비들은 나중에 온 버스를 국군 지원 병력으로 착각하고 밤 10시 15분 최 서장을 향해 연발 사격을 하였다. 최 서장은 가슴에 3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1.21사태의 첫 희생자였다. 공비들은 남한 시내버스를 처음 접했을뿐더러 어두운 밤이라 시내버스를 군용 버스로 오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김신조는 증언하였다.

대열 맨 뒤에서 공비 김춘식과 얘기를 나누던 박.정 두 형사는 순간 김춘식을 제압한 뒤 수갑을 채웠다. 이를 본 공비들이 두 형사에게 총격을 가했고 정종수 경사가 쓰러졌다. 정종수 경사는 4발의 총탄을 맞고 병원에 입원했으나 9일 후 순직했다. 김춘식은 체포된 그날 밤 치안국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폭했다.
공비들은 버스 안에 군인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버스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면서 3발의 수류탄을 던졌다. 버스 승객 중 청운중학교 학생과 회사원 한 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경복고 후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뛰어내리자 공비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국군인 줄 알고 세 갈래로 흩어져 도망쳤다. 일부는 오던 길로 거슬러 세검정으로, 일부는 경복고 담을 넘어 인왕산으로, 다수는 바로 옆 북악산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경복고 수위가 그들의 총에 희생되었다.

1월 22일 새벽
우리 군경과 무장공비들이 본격적인 교전을 벌인 곳은 세검정 길과 북악산 일대였다. 당시 교전 때 총탄의 흔적은 북악산 호경암과 북악산 정상 1.21 소나무에 남아있다. 김신조가 인왕산 기슭에 숨어있다 투항한 것은 22일 새벽 2시 30분이었다. 김신조 나이 27세 였다.

1월 23일 오후 1시
북한산에서 공비 1명이 사살된 후 나머지 공비들은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 나갔다.
1월 24일 이후
서울을 벗어난 후 공비들은 노고산, 포천. 문산, 파주 등지에서 출몰해 교전이 계속되었고 공비 소탕작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곳은 단연 양주 노고산이었다. 계속된 소탕작전으로 31명의 공비 가운데 김신조를 제외한 28명이 죽고 2명은 행적이 묘연했다. 2명 중 1명은 2월 중순에 경기도 양주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으며 나머지 1명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종결하였다. 31명 중 사살 29명, 생포 1명, 도주 1명으로 일단락 된 것이다.

우리 측은 군경 전사자 25명, 민간인 7명으로 총 32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부상자도 민경군 합하여 52명이나 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다.

.북한은 청와대 침투가 실패하자 이틀 후인 1월 23일 동해상에서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는 사건으로 북미간의 긴장을 조성하고 그 해 10월 30일에는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을 침투 시켜 극도로 남북 긴장을 고조 시켜 베트남 호치민과의 약속을 지키는데 노력하였다. 사회주의자 김일성과 호치민의 약속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안보의식의 변화
군사적으로는 수도 경비 강화를 위해 북악스카이웨이와 인왕스카이웨이를 건설하였다
휴전선 155마일 중 미군 측은 철책이었으나 국군 측은 목책이었던 것이 철책으로 바꿨다.
육군 복무기간이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늘어났고 250만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육군제3사관학교가 창설되었으며 김일성 살해 목적의 실미도부대가 인천 실미도에 생겼다.
행정적으로는 그해 11월 전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주민등록증 발급제도가 신설되었다.
주택정책으로는 유사시 지하공간을 방공호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착안하여 반지하 주택을 임대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허용하여 저소득층의 주거 대안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공비들이 청와대 근처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세검정과 평창동의 개발 부진에 있다고 판단해 평창동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조성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재선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3선개헌을 검토하고 이듬 해 69년에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의 토대를 만들었다.

김신조는 조사과정에서 북한의 많은 정보를 알려준 공로를 인정받고 침투 당시 총을 한 발도 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되어 2년 만에 풀려나 안보교육의 현장에서 강연자로 활동하였다. 결혼과 함께 목회자 생활로 노후를 보내다 2025년 4월 9일 83세의 나이로 요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래 그림은 2009년 김신조가 공비들의 퇴각로인 호경암의 총탄자국을 만지면서 그날의 격전을 회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무리를 하며
김신조가 전향하지 않았다면 역사적인 1.21사태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칠흑같은 밤에 남과 북의 작은 전투가 북악산에서 일어났고 호경암에 탄흔 50발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들에 그날의 상처를 남겨주었다.
북악하늘길 산행에서 탄흔 투성이 호경암과 김신조루트를 걷다가 문득 57년 전 1.21사태의 전말이 궁금해 졌다.
하루종일 인터넷 검색창에서 수많은 글을 읽으면서 주요 핵심만 추려보았다. 그리고 한 눈으로 보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대 별로 정리해 구성해 보았는데 읽은 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크던 작던 나라의 역사는 장대하다.
이 역사의 기록도 끊임없이 대를 이어 읽혀질 것이기에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은 보람을 느끼면서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의 심장
청와대 자리는 경북궁의 후원이었다.
창덕궁의 후원이 비원인 것처럼 임금의 휴식공간으로서 경관이 뛰어나야 한다는 목적에 부합되는 청와대 자리이다.그러던 후원이 일제 강점기 때 경복궁과 후원을 분리하는 도로를 만들어 청와대 자리는 일찌기 경복궁이 아니었다로 인식되어 왔다.
청와대 자리는 일제 치하 때 일본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 치하에서 하지장군의 관저로 잠시 쓰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사용하면서 관저의 이름을 경무대로 바꿨다.
1960년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관저의 이름을 청와대로 개정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91년 노태우 대통령 때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어 나름 대한민국 심장으로 역할을 하여 왔다.
청와대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ky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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