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고향>
벌교 출발 후 1시간이 지나서 첫 기착지인 과역에서 내렸다. 과역은 면소재지로 녹동으로 이어지는 국도와 팔영산으로 가는 성기리 행 지방도가 갈라지는 삼거리이며 전국으로 유통되는 마늘의 20%를 차지하는 마늘 생산지로 유명한 지역으로 들은 바 있다. 과연 버스에 내리자 터미널 앞 공터에 어마어마한 마늘 보관소의 위용이 그 말을 뒷받침한다.
면사무소 방문시간에 마춰 대합실에 앉아 있노라니 주위가 시끄럽더니 자주색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대합실로 밀려 들어온다.
그들은 버스 대합실 중앙을 점거하며 한없이 재잘거리지만 귀에 거슬리거나 싫지도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 하나 이들이 누나의 고향 후배이기도 하고 하얀 도시 여학생들과 달리 얼굴 색이 한결같이 구리 빛 이기때문이다.
이들은 매일 아침 30분 정도 걸리는 고흥 읍내로 통학하는 고흥여고 학생들이다. 이윽고 군내 버스가 대합실의 학생들을 송두리째 태우고 고흥읍내로 매연을 품어내며 달려가는 완행버스의 뒤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문득 코끝이 시려옴을 느낀다.
“ 얘들아, 부디 졸업하드래도 도시로 떠나지 말고 고흥을 지켜 다오 !
아침을 대충 때우고 그다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면사무소로 가야할까 아니면 곧장 팔영산으로 갈까 잠시 머뭇렸지만 원래 계획 대로 면사무소로 갔다. 터미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면사무소 앞에서 용기를 내어 면직원 앞에 앉았다. 무조건 과역면의 박선자를 찾아내라 하니 면직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박선자라는 이름 하나로 생가 주소를 찾으려는 계획이 애초부터 무리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실패로 끝나니 어리석은 본인이 우습다.
한국 100대 명산의 하나인 팔영산
< 능가사를 향하여! >
애초부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의 간절함을 거절당하니 씁쓸하고 겸연쩍은 마음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마치 누나가 그의 첫 사랑을 거절하는 느낌이 들어 더더욱 마음이 쓸쓸하다.
10시에 출발하는 성기리 행 버스는 촌노들을 가득 채우고 기우뚱거리며 국도를 버리고 지방도로로 들어선다. 오늘이 마침 고흥 장날 이라 만원 버스에 허리가 꺾인 채 30분을 견디다보니 어느새 능가사입구에 도착하고 능가사 뒤로 부채꼴 모양의
8개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 저게 8개의 그림자 산 팔영산( (609m)인가 !
능가사는 사찰은 산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평지에 고풍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팔영산을 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경내를 지나가야 한다.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오래된 대웅전 뒤뜰에는 며칠 전 초파일 행사에 쓰여진 것으로 짐작되는 연등 꾸러미와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오래된 차 밭이 썰렁하게 누워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근처가 차 밭으로 유명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오늘날은 그 찬란했던 차 산업은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고 보성에서 옮겨 심었다는 영양 실조 걸린 차 나무 몇 그루만이 종가집 며느리가 되어 황폐된 차 밭을 지키고 있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