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름 : 보련산 (764m )
산위치 : 충북 충주시 노은면
산행일자 : 2006년 2월 24일
교통편 : 42인승 버스대절
충주를 중원이라 표현하는데 삼국시대 때 남북의 요충지로 신라 고구려 백제가 항상 각축을 벌리던 곳으로 지정학적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충주에는 중원에 걸맞게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원고구려비가 있었고 중앙탑이라 부르는 석조 7층 석탑이 있다.
통일신라 때 국토의 중앙이 어딘가 측정하기 위해 북쪽에서 1명을 남으로 보내고 남쪽에서 1명을 북으로 보내 둘이 만나는 장소를 중앙으로 보고 그 자리에 중앙탑을 세웠다.
탄금대는 남한강에 접해 있는 야트막한 대문산에 있는데 기암절벽으로 되어있다. 우륵이 가야국에 살다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 하였는데 진흥왕은 우륵을 충주에 거주시켰다. 우륵은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타며 생을 보냈던 곳이라 하여 탄금대라 이름이 붙었다
신립장군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고니시유끼나까(소서행장)는 가도기요마사(가등청정)보다 한발 앞서 2만여 군사를 700척의 함대에 싣고 부산항에 도착 하여 부산성과 동래성(부사 송상현)을 함락시키고 북상하고 있었다.
선조(25년)는 왜군이 부산을 함락하고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어전회의를 열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으나 아무도나선 사람이 없자
“갑자기 모두가 벙어리가 되었는가?” 선조가 소리를 높이자 서로 붕당을 짓고 서로 헐뜯고 할 때는 언제고 발에 불이 떨어지자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육조 판서 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전쟁터와 한양은 너무 멀어 상황을 잘 모르니 3정승 중에 한 사람을 보내 대신하여 총지휘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했더니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싶은 선조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신하들을 쏘아보며
“그럼 누가 갔으면 좋겠는가?” 선조가 재차 묻자 영의정 이산해가 한 발짝 나오더니
“신과 우의정의 집이 한양인지라 그쪽 물정을 모르나 좌의정 유성룡은 고향이 안동이고 전에 경상감사도 하였으니
유성룡이 좋을 듯싶소이다.”이산해는 대립관계에 있던 유성룡을 자연스럽게 끌어 들였다.
창졸간에 전쟁터로 가게 될 유성룡은 어명을 어길 수 없어 같이 갈 장수를 찾아 나섰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장수들이 사양하는 바람에사양하는 바람에 답답한 마음으로 같이 갈 마땅한 장수를 찾을 수가 없다며 한성판윤(서울시장) 신립에 상의 한다.
신립은 어명이 떨어지면 장수가 전장에 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며 장수들을 나무라고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유성룡은 임금에게 가서 신립과 동행을 요청하나 선조는 신립 같은 대장군은 도성을 지키는데 쓸 것이라며 반대하나 유성룡은 극구 신립을 추천하여 결국 선조의 윤허를 얻어 낸다.
왜군은 이미 상주성을 함락하고 문경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도순변사가 된 신립은 유성룡이 급조 해준 80여 군관들과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성으로 달려갔다.
충주목사 이종장과 종사관(부사령관)김여물은 조령에서 복병을 배치 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자고 신립에 건의 하였으나 신립은 한사코 반대한다. 신립은 지난날 오랑캐를 물리친 기병의 위력을 생각하며 지형의 이로움을 가볍게 보고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면 적을 무난히 물리 칠 것으로 생각하였다.
신립은 4월 28일 8,000여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충주성을 빠져나와 탄금대로 향하였다. 신립은 뒤로는 남한강의 깎아지른 절벽이고 앞으로는 충주분지가 펼쳐진 탄금대에서 학 날개의 배수의 진을 치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니시유끼나까(소서행장)가 이끈 15,000명의 왜군과의 정오부터 시작된 전쟁은 반나절만에 싱겁게 끝났다.오합지졸인 우리군사와 오랜 전란을 겪은 왜군들의 저력과 조총을 무기로 무장한 싸움은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군 4,000여명이 도망가고 3,000여명이 죽음을 당하니 신립은 전의를 상실하고 종사관 김여물에게 “그대를 살려 볼까 하오" 하면서 우선 몸을 피해 앞날을 기약하라는 신립의 명령에 불복한 김여물은 "어찌 제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둘이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탄금대 아래로 몸을 던졌다. 충주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은 의주로 몽진을 하게 된다.
신립의 나이 47세 추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충주목사 이종장은 아들 이희립과 처절하게 싸웠으나 부자 둘다 전사하였다
1981년에 시민들의 뜻을 모아 탄금대에 신립장군과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탑을 세웠다.
KY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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